경허 선사와 함석헌 선생 고독 - (불교 의식 모르는 한 입학생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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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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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크리스마스 날 오후였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남천과 조팝나무로 만든 생 울타리 주변에 잡풀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조급한 성미이다 보니, 내년 이른 봄부터 무성해진 잡초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이 그만 아찔하게 느껴져 잡초를 뽑고 있었다.
그 때에 울타리 밖 길가에 인기척이 있었다. 낙엽이 졌기에 듬성듬성해진 생 울타리 나무 가지 사이로 30대 후반 여인이 하나 보였다. 그녀가 사람 키 높이인 울타리 너머로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 안녕 하세요 ? 날씨도 추운데 무슨 일을 그리 열심히 하세요 ?”
도시에서 온 뜨내기인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 있는 마을 여자는 매우 한정 되어있다. 더구나 젊은 여자가 먼저 나에게 인사말을 걸어 온 적은 없기에 의아해서 바라보았다. 말기 암 환자인 옆 집 노인은 며느리가 4명이었는데 , 그 모두가 나와 길에서 마주치면 말없이 가볍게 목례를 하곤 했다. 그래서 혹시 그 중 한명인가 추측하고 인사말을 받았다.
“ 노인네들이 걱정되어 위로 해주려고 또 온 모양이구만---. 어르신 투병 생활을 보면 대단한 분이시지. ”
그 여자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한 동안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낌새로 미루어 보니, 내 짐작이 틀렸나 보다. 남의 집 며느리들 외모를 눈여겨 관찰해서 내 기억 속에 저장한바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
“ 병문안을 온 것은 아니고요 ---, 사람들이 거짓 종교인들에게 속아 살고 있기에 진실을 알려 주려고 왔습니다. ”
“ ---------------? ”
“ 어르신.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 오늘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휴일 아닌가요?”
“ 거 보세요. 거짓 종교인들에게 속았기 때문에 오늘이 크리스마스로 잘못 알고 있어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12월 25일에 태어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
그녀가 따르는 기독교 종파만이 참된 종단이라 강조하기 위해 도입한 기발한(?)주장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기교(테크닉)가 유치해 보여 , 나를 지적으로 매우 미숙한 어린애 취급한 것만 같아 찜찜했다.
나이가 들면, 말과 행동이 다시 어린애로 돌아간다는데---- 내가 어느 듯 그 단계에 접어들었는지---.
“ 탄생일이 언제인가 따지는 것이야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지 종교적 진리를 찾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예수가 태어난 날이 3월 1일이든 , 4월 19일이든 , 5월 18일이든 나에겐 그다지 큰 문제로 보이진 않는데----.”
“----------------. ”
“ 혹시 ‘여호와 증인’ 종단에서 오셨나요?”
“ 네!”
“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 봅시다.”
“-------------. ”
“ 여호와 증인 젊은 청년들은 군대에 갔을 때 , 투옥될 지라도 집총을 거부할 정도로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뛰어난 분들로 들어왔고 그래서 존경스럽게 여겼습니다만--. ”
“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아버지, 이 원수들에게 반드시 복수해 주십시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 ‘ 아버지 , 저들을 용서하소서. ’ 라고 기원했지요? 바로 나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에게 마저 관용적인 너그러움을 보이는 사랑이란 이 땅에서 모든 참혹한 전쟁마저 없애는 위대한 힘이기에 종교적 진리로 존중되어지고 ,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집총 거부 아닌 가요 ? ”
“ 정확하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
“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면 , 적의 성을 함락한 후 ,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 ---심지어 갓난아이들까지 모두 죽이는 것이 하나님 뜻을 잘 따른 착한 행동으로 묘사되어 있지요? ”
“ -------------. ”
“ 신약에서 말하는 기도교적인 진리가 구약에서 부정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할 터인데 겨우 크리스마스 날이 언제이냐에 몰두한다면---. 너무 손해 보는 것 아니요? ”
“ ------------. ”
“ 종단을 이룬 성자가 어느 날 태어났는지? 그리고 그가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 또 누구와 만났는지 ? 등등 곁가지에 관심을 집중하면 게으름을 피우는 종교인들로 보여서 그만---. ”
“ 어르신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나 새해가 된 어느 날이었다. 약 3개월 전에 내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 목사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님 한분을 그 교회에 초청해서 설법을 그 교회교인들과 함께 들은 적이 있는데--- 새해 첫날 그 스님과 새해 인사를 전화로 주고받게 되었다.
인사가 오고 가던 중 ‘ 기독교 교회 예절에 익숙하지 못해 혼자 예배에 참가하기가 부담스러워 크리스마스 날 교회를 방문해서 축하의 인사말 한마디 못했습니다.’ 며 아쉬워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한 그 스님이 타 종교 예배 형식이나 절차를 모른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겠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진리는 무엇인지 알아보고 존중해주려는 열린 생각만 지닌다면, 굳이 겉치레(기독교적인 예배 의식)를 모두 무시해버린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겠다.
나는 교회 예배 중 모든 종교 의식에 대해 철저히 눈을 감은 침묵 가운데 설교 내용이나 찬송가나 기도하는 내용만을 세밀히 귀 기울여 바라보곤 한다. 불교 법회에 참여할 때에도, 익숙지 못한 불교 의식 절차에 대해 의도적으로 눈감고 법사의 설법만을 바라보려 노력하다보면 어색해질 필요가 없어 불편이 없었다.
교회나 성당, 혹은 절의 의식이란 종교적 진리에 쉽게 접근하는 인연을 만들어 주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겠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따르기 힘든 나머지 주눅 들게 만들 정도로 복잡하거나 , 꾸밈(의식)이 너무 요란해서 그만 시선(정신)을 끌어 가버려 종교적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려버린다면 큰 문제이리라.
모든 말과 행동은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면--- , 절집을 떠나 속가에서 은둔 생활을 하신 경허 스님의 말년 행동이나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를 표방하신 함 석헌 선생님의 행동은 어떤 생각에서 나왔을지 궁금하다.
선방에서 참선 수행 중인 후배 제자스님들로부터, ‘ 큰 스님이 여기 오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일어나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 이대로 앉아있을 것인지?’ 현재 우리 생각을 맞추어보라는 시험을 받은 스님이 있었다.
그는 그 후배들을 향해 주먹을 보이며 ‘ 내가 이 주먹을 펼 것 이냐 ? 아니면 안 펼 것이냐 ? ’ 되묻는 방식으로 그 후배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그 가르침의 핵심을 고려하면, 어찌 경허 선사나 함 석헌 선생님의 그 당시 생각을 있는 그대로 헤아릴 수 있을까 ?
그저 두 분 선지식(善知識)의 생각사이에 어떤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는 심증만이 있을 뿐이다.
생각이 닫힌 상태에서 입만 열린 나머지 듣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설득력을 논리가 아닌 목소리 크기에 의존하다보니 귀를 매우 피곤하게 만드는 고함, 생각도 닫히고 입도 닫히다보니 옹색한 나머지 신앙만 강조하는 모습, 생각은 열렸으나 아직 안( 좋은 생각)과 밖(행동)을 일치시키는 수행이 부족한 상태라서 말을 하는 량에 비례해서 덕을 잃게 되는 종교 지도자들--- 그들이 이끄는 종교 집회에 참석해서 요란하고 화려한 종교 의식들과 마주칠 때 받는 내 느낌은?
지독한 추녀(醜女)를 시집보내기 위해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려 신방에 들여 보내보았자 꾸밈으로는 한계가 있어 소박을 피하기 어려운데--- 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원래는 세상을 위해 성자들의 위대한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 시작된 기독교 , 천주교, 불교, 힌두교라는 종교 체제(시스템)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 현재에 이르다 보니 그 역할이 어느 듯 뒤 바뀌어져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종교 체제와 그 체제 종사자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성자들의 업적과 가르침이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상태인 교회나 사원에 가보면 엄숙한 예배의식이나 ‘여러 지위 계급을 기초로 한 제도(system)’라는 잡풀만 무성한 경우가 허다하다.
경허 선사나 함 석헌 선생 같은 선지식들은, 그래서 은둔형(隱遁形) 환속(還俗)이나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를 택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선지식들의 짙은 고독이 저녁노을만큼이나 어찌나 처연(凄然)해 보이는지!
( 불교 의식을 전혀 모른다면 , 입학 후 한동안 너무 크게 당황할까봐 염려 되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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